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9.13 사건 (문단 편집) == 배경 == 1971년 8월 15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을 떠나 후베이성 우한으로 순시를 떠났다. 당시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경계하고 있었으며 인민해방군 우한 군구 정치위원 유풍을 불러 분열주의를 비난했다. 그리고 우한, 창사, 난창, 항저우 등을 순시하며 각성의 당정군 책임자들을 소집하여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황용셩, 공군 총사령관 우파셴, 해군 제1정치위원 리쭤펑, 군총후근부 부장 치우후이쭤 등 린뱌오의 측근들과 린뱌오의 아내 예췬을 마구 비난하며 이들이 지하 활동을 하고 느닷없이 습격을 해 왔으며 서둘러 국가주석이 되려고 당을 분열시키고 권력을 탈취하려고 했다고 했다. 또한 여산 회의는 두 사령부의 투쟁이었다고 지목했다. 이는 명백히 이들의 배후에 있는 린뱌오를 지목한 일이었다. 한편 남방 순시를 떠난 마오쩌둥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던 린뱌오, 예췬, 린리궈 등은 허베이성 베이다이허(북대하)의 전용 별장인 중앙요양원 96호에 기거하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9월 6일이 되어서야 광저우 군구 공군 참모장 고동주와 해군 제1정치위원 리쭤펑이 마오쩌둥의 발언에 대해 린뱌오에게 보고했다. 마오쩌둥의 발언에 대해 들은 린뱌오, 린리궈, 예췬, 린뱌오의 사조직인 <연합 함대>의 일원이며 공군 사령부 판공실 처장 주우치 등 4명은 6일 저녁 9시부터 11시까지 밀담을 나누었으며 린뱌오와 예췬은 9월 7일 새벽까지 계속 회의를 했다. 9월 7일, 린리궈가 행동에 들어가서 [[571 공정]]이라고 불리는 [[쿠데타]] 계획을 가동하였다. 하지만 린리궈 일행이 결행하지 못하고 탁상공론을 하는 사이에 마오쩌둥의 열차가 갑자기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9월 12일 오후 1시 10분 마오쩌둥의 열차가 풍대에 도착했고 오후 4시 5분에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마오쩌둥은 자동차를 타고 거처인 [[중난하이]]로 이동하였고 571 공정은 마오쩌둥의 신속한 움직임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자세한 것은 [[571 공정]]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